시골 여자

내 고향 김천

리조이 2024. 6. 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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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땐 시골에 산다는 것이 싫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하숙집에 모인 시골 친구들이 우리는 인구 몇만이야, 우리는 백화점이 있어.라고 하는 장면을 보며 많이 찔렸고 웃기도 했다. 중,고등학생때 세이클럽, 버디버디 채팅 같은걸 하다가 김천에 산다고 하면 김밥천국?이라고 하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시골아니냐고 하는 말에는 "허, 인구 15만 도시거든?"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어릴땐 시골이라는 말이 정말 듣기 싫었다. 꽤 폐쇄적이었던 우리 동네는 시골인 김천중에서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시골이라고 놀리는 그런 곳이었다. 그 동네에 산다고 왕따를 당하기도 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결혼을 했다. 아주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롯데월드로, 한창 유행하던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동대문, 남대문으로 데려 다녔고, 때론 뮤지컬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당발인 오빠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면 난 특별한 사람이 되곤 했다. 사투리 써봐, 어머 귀여워, 거기가 어디야? 너무 부럽다. 이런 말들에 점점 시골에 사는 것이 나쁜게 아니구나, 특별하고 멋진거구나? 하는 기고만장함이 생긴 것 같다.

 

결혼한 내친구 진진이는 시골이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누가 거기 시골아니야? 라고 하는 말에 엄청나게 화를 난다. 이해가 되기도, 안되기도 하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향은 다를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진진이 앞에선 시골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집, 내고향 김천은 내게 시골이다.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 주로 도시보다 인구수가 적고 인공적인 개발이 덜 돼 자연을 접하기가 쉬운 곳. 내겐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는 곳. 따뜻하고 기분 좋은 향기와 추억이 남겨져 있는 곳. 잊고 싶지 않은, 남들은 겪어보지 못했을 신선함이 있는 곳. 지난주엔 일주일간 김천에 다녀왔다. 내고향 김천은 많이 발전했지만 찬찬히 걸어다니며 자연들을 보고 있자니 여전했다. 어릴적 살던 집은 완전히 철거해 없어졌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은 곳곳에 남아 내 마음을 평온케 했다. 

 

 

초등학생땐 동네로 가는 버스를 놓치면 이 길을 걸어다녔다. 어느날 갑자기 빨간마스크라는 괴담이 김천을 덮었었는데, 그 날 마침 또 버스를 놓쳐서 걸어갔어야 했다. 항상 차도 많이 지나다니고, 걸어가는 동네 언니 오빠들이 있었던 길이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동생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데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상상력이지만 진짜 오줌 쌀 뻔 했다. 지난주엔 날씨가 내내 좋았다. 커피를 사려면 최소 30분은 걸어 나가야 했다. 기꺼이 집을 나섰다. 푸르른 날씨가 서울의 어떠함과는 많이 달랐다. 동네에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나는 그들을 다 기억하는데 너무나 커버린 나를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아, 어떤 할머니는 "많이 컸네"라고 하셨다. 원래도 컸어요!

 

 

노란 꽃, 하얀 꽃, 보라 꽃이 만발해 있는 강변에 하얀 나비, 노란 나비, 호랑 나비가 팔랑 팔랑 날아다니면서 꽃이 춤추는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올림푸스 TG-5를 가지고 있어서 마크로 모드로 찍어 봤는데 가만히 있는 나비는 호랑 나비 뿐이었다. 어릴때도 곤충 같은걸 좋아해서 굼벵이를 키우는 친구에게 분양 받아서 집에 가지고 갔다가 엄마한테 많이 혼났었다.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개미를 계속 관찰하거나 공벌레 줍고, 물 위에 떠다니는 소금쟁이들을 지켜보는 것도 참 재밌었는데,,

 

 

더 더 멀리 가다 보니 두루미? 왜가리? 구분하지 못하지만 아무튼 커다란 새들이 여러마리 있었다. 가을쯤 되면 오리들도 동동 떠다니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었지. 딱 한명남은 김천 친구, 동네에서 함께 나고 자란 소율이도 만났다. 어릴때부터 서로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하면서 24살에 결혼하자고 독려하던 사이. 초,중,고도 같은 학교를 나왔고 교회도 함께 다녔던 소율이는 우리의 꿈 그대로 뱃속에 둘째를 가진 완전한 애기엄마가 되었다. 계속해서 김천에 사는 소율이와 20살부터 서울에 살면서 옛날의 가치관은 많이 버린 나. 가끔은 말이 안통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무 사랑하는, 만나면 한없이 편한 내 친구. 결혼한다고 했을땐 엄청 걱정했었는데 또 그녀만의 삶 속에서 너무나 굳건히 멋있게 해내고 살아가는 모습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내고향 김천 시골엔 내 친구 소율이도 있다. 사랑하는 부모님도 있고, 작년 죽은 진순이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두리도 있다. 

 

난 시골여자인게 부끄러운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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